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안 준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이미 표지가 익숙한 책이었다. 인기가 많은 것은 왠지 모르게 뒤로 미루는 편이라 이제서야 제대로 펼쳐보았는데 프롤로그부터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날 줄이야..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안 준 것이다.

남편과 만나는 동안 3번의 헤어짐이 있었다. 2년만에 다시 만난 날, 그는 부탁하지도 않은 생수 한 박스를 사왔다. 함께 지내던 시절, 자전거로 15분 정도 떨어진 슈퍼에서 매주 어깨가 무겁게 물을 사 오던 나를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는 늘 나의 시간을 바라보고 기억했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부분을 바꿔두거나 청소했다. 자취한 지 3년이 넘도록 전자레인지를 쓰지 않던 나를 보고, 집 주변 홈센터를 뒤져 가장 마음에 드는 전자레인지를 골라두었다. 500엔이면 배송받을 수 있는데 이것도 추억이라며 자전거 뒤에 싣고 30분을 걸어왔다. 따뜻한 요리와 가구를 만들어주었고 어디서 산 지도 모를 아기자기한 비즈로 장식한 샌들을 선물했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너를 많이 좋아해 같은 초등학생이 쓴 듯한 엽서를 보내주었다. 마중나오길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와의 사진을 정리하려고 정리하다보니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내가 찍힌 사진들이 여러 장이었다. 내가 그를 보고 있지 않던 시간에도 나를 프레임에 담고 있는 그가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걸 매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시간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받는 것을 좋아한다.

편지를 쓰고 보내는 것은 품이 든다. 편지지를 고르고 한정된 지면에 어떤 말을 쓸까 곰곰이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많은 말들 중 가장 전하고 싶은 것으로 한 자 한 자 채워나간다. 가만히 앉아 부단히 손을 움직인다. 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인다. 우체국이나 집 근처 우체통이 있는 곳까지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편지를 보낸다.

내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에는 그 시간들이 함께 담겨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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